우리나라 떡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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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푸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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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4-01-12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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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시대 이전
우리 민족이 언제부터 떡을 먹기 시작하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삼국이 성립되기 이전인 부족국가 시대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시기에 떡의 주재료가 되는 곡물이 이미 생산되고 있었고, 떡의 제작에 필요한 갈판과 갈돌, 시루가 당시의 유적으로 출토되고 있기 때문이다.
황해도 봉산 지탑리의 신석기 유적지에서는 곡물의 껍질을 벗기고 가루로 만드는 데 쓰이는 갈돌이, 경기도 북변리와 동창리의 무문토기시대 유적지에서는 갈돌로의 발전 이전 단계인 돌확이 발견된 바 있다. 또한 나진 초도 조개더미에서는 양쪽에 손잡이가 달리고 바닥에는 구멍이 여러 개 난 시루가 발견되었다. 그런데 곡물을 가루로 만들어 시루에 찐 음식이라면 '시루떡'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민족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시루떡 및 시루에 찐 떡을 쳐서 만드는 인절미, 절편 등도 보인다. 다만 아직 쌀의 생산량이 많지 않았으므로 쌀 외에도 조, 수수, 콩, 보리 등 각종 잡곡류가 다양하게 이용되었을 것이다.
(2)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사회가 안정되자 쌀을 중심으로 한 농경이 더욱 발달하게 되었다. 쌀을 주재료로 하는 떡이 더 한층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고구려 안악 3호분 벽화에는 시루에 무엇인가를 찌고 있는 모습이 담겨있으며 여러 삼국시대의 고분에서는 시루가 출토되고 있기도 하다. 이와 더불어 「삼국사기」,「삼국유사」 등의 문헌에는 떡에 관한 이야기가 많아 당시의 식생활 중에서 떡이 차지했던 비중을 짐작하게 한다.
「삼국사기」신라본기 유리왕 원년(298년)조에는 유리와 탈해가 서로 왕위를 사양하다 떡을 깨물어 생긴 잇자국을 보아 이의 수가 많은 자를 왕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 같은 책 백결 선생조에는 신라 자비왕대(458∼479년) 사람인 백결선생이 가난하여 세모에 떡을 치지 못하자 거문고로 떡방아 소리를 내어 부인을 위로한 이야기가 나온다. 깨물어 잇자국이 선명히 났다든지 떡방아 소리를 냈다든지의 기록으로 보아 여기서 말하는 떡은 찐 곡물을 방아 등에 쳐서 만든 흰떡, 인절미, 절편 등 도병류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백결선생이 세모에 떡해먹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겼다고 하여 당시에 이미 연말에 떡을 하는 절식 풍속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3) 고려시대
삼국시대에 전래된 불교는 고려시대에 이르러 역사상 최고조로 번성하게 된다. 불교문화는 고려인들의 모든 생활에 영향을 미쳤으며 음식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육식의 억제와 음다(飮茶)풍속의 유행은 과정류와 함께 떡이 더욱 발전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와 더불어 권농 정책에 따른 양곡의 증산은 경제적 여유를 제공하여 떡의 발전을 더 한층 촉진하였다. 고려시대에는 특히 떡의 종류와 조리법이 크게 다양해져 주목된다.
「거가필용」에 '고려율고'라는 떡이 나오는데, 한치윤의 「해동역사」에는 고려인이 율고(栗嘌)를 잘 만든다고 칭송한 견문이 소개되고 있다. 율고란 밤가루와 찹쌀가루를 섞어 꿀물에 내려 시루에 찐 일종의 밤설기이다. 설기떡을 찔 때 꿀물을 내리면 공기가 고르게 들어가 떡의 탄력성이 커지고 쉽게 굳지 않으므로 상당히 과학적이라 할 수 있다. 이수광은 그의 저서「지봉유설」에서 상사일(上巳日)에 청애병(靑艾餠)을 해먹는다고 하였다. 어린 쑥잎을 쌀가루에 섞어 쪄서 만든다고 하였으니 쑥설기인 셈이다. 이 외에도 송기떡이나 산삼설기 등이 등장한다. 즉, 이전에는 쌀가루만을 쪄서 만들던 설기떡류가 쌀가루 또는 찹쌀가루에 밤과 쑥 등을 섞어 그 종류가 다양해졌다.
(4) 조선시대
조선시대는 농업기술과 조리가공법의 발달로 전반적인 식생활 문화가 향상된 시기이다. 이에 따라 떡의 종류와 맛은 더 한층 다양해졌다. 특히 궁중과 반가(班家)를 중심으로 발달한 떡은 사치스럽기까지 하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곡물을 쪄 익혀 만들던 것을 다른 곡물과의 배합 및 과실, 꽃, 야생초, 약재 등의 첨가로 빛깔, 모양, 맛에 변화를 주었다. 조선 후기의 각종 요리관련서들에는 매우 다양한 떡의 종류가 수록되어 있어 이러한 변화를 짐작하게 한다. 각 지역에 따라 특색있는 떡이 소개되어 있는 것도 이채롭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관혼상제의 풍습이 일반화되어 각종 의례와 대소연회, 무의(巫儀) 등에 떡이 필수적으로 사용되었다. 고려시대에 이어 명절식 및 시절식으로의 사용도 증가하였다.
자료 ; 궁중음식연구원